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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영의 역사 2회: 중세 시대의 수영과 목욕 문화

by Oceanic 2023. 12. 23.

로마 제국 몰락 후 물에 대한 인식 변화

로마 제국이 멸망한 이후(서기 476년), 점차 물은 인기를 잃게 되었고,  물과 접촉하는 것은 더럽고 죄악된 것으로 여겨졌다.  심지어는 사람들이 "매일 목욕하는 것과 야외 수영은 건강에 해롭다"고  주장에 이르렀다.

서기 542년경 비잔틴 군대가 페스트와 나병을 유럽에 가져오면서, 이러한 생각은 어느 정도 근거를 갖게 되었다. 물이 질병의 원인이 될 수 있다고 여겨져, 멀리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 기독교 선교사들은 물을 사악한 것으로 몰아갔고, 일부 저술가들은 엎드려 수영하면서 입을 질병의 매개체인 물과 접촉하는  남자의 모습을 '역겹다'고 묘사했다. 그들에게 수영은 죄 많은 여자처럼 유혹하는 성적 쾌락과 같았다: "육체적 쾌락의 원천으로서, 그것은 악, 죄, 유혹의 대명사였다."

중세 초기의 신체 문화와 위생 교육에 대한 경시

"육체적 허영심"에 대한 경멸과 신체 문화 및 위생 교육에 대한 경시는 중세 초기 남성들의 특징이었다. 금욕적인 생활 방식이 영혼의 정화와 구원으로 이어지며, 수영과 같은 신체 활동의 중요성은 저평가되었다. 기독교의 확산과 함께 수영과 목욕 문화는 쇠퇴했고, 교회는 "순수한 육체가 불결한 영혼을 감춘다,"pure body covers impure soul”는 이유로 신체 활동과 목욕을 금지했다. 

 

Medieval representation of a bath from a 15th century manuscript by a famous Flemish painter.(

중세 기독교와 이중적 인간상의 창조

중세 기독교는 인간에 대한 이중적 이상(理想)을 조성했는데, 하나는 육체를 경멸하고 오직 영혼만을 돌보는 고행자였고, 다른 하나는 세속적 성인, 즉 무장한 신앙의 전파자이자 수호자인 기사였다. 기사 시대에는 기사 교육이 높은 수준의 신체적 요구를 필요로 했고 수영은 기사가 갖투어야할 7가지  기술 중 하나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갑옷이 무거워지면서 기사들의 수영 방식은 변화하여, 말을 타고 수영하는 방식으로 발전했다. 기사들은 물을 건너기 위해 기마 수영 기술을 배워야 했다.

12-13세기 유럽의 목욕 문화 부활

12~13세기에는 금지령에도 불구하고 유럽 전역에서 목욕 생활이 다시 급증했다. 11~14세기까지 대부분의 도시에서 목욕탕은 정기적으로 운영되었고 민간 목욕탕은 수영보다는 오락을 위한 목적으로 인기를 끌었다. 목욕탕은 친밀한 사교 생활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종종 매음굴로 기능하기도 했다. 1500년대 후반부터 남녀가 함께 목욕하는 것이 금지되지는 않았지만, 전염병과 방탕의 확산으로 인해 교회는 유럽에서 목욕탕을 폐쇄하기 시작했다. 
 

Floating man” from the book by Bernard in 1685

  
수영과 목욕에 대한 편견과 목욕탕의 폐쇄로 인해 수상 기술 교육이 부족해졌고, 그 결과 익사 사고가 큰 비율로 증가했다. 이를 막기 위해 1643년 비엔나, 1650년 프라하, 1661년 파리 등 유럽 전역에서 공중목욕과 수영이 금지되었다.  당시 헝가리에는 여전히 활발한 목욕 문화가 있었지만, 이 제한 조치는 헝가리에도 영향을 미쳐 합스부르크 왕가 시대에 금지령이 발효되었습니다. 마리아 테레지아(Maria Theresa) 여왕은 교육에 관한 법령인 '율령 교육법'에서 수영을 금지했고, 1786년에는 생명 안전을 이유로 발라톤 호수에서의 목욕을 금지하는 또 다른 법령을 발표했다. 그러나 물의 유혹을 거부할 수 없었던 사람들 중 규정을 지키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했고, 강과 호수에서 인명 피해가 계속 발생했다.

수영 금지에 맞선 인문주의 사상가들

수영 금지령에 맞서 인본주의 사상가들은 수영 금지 규정이 아니라 수영 강습을 통해 익사를 막을 수 있다고 믿었다. 독일 잉골슈타트(Ingolstad)의 대학 언교수였던 니콜라우스 빈만 (Nicolaus Wynmann)이 1538년에 출간한 최초의 수영 교본 역시 교회와 금지령을 무시하고 수영을 장려하고 그 중요성을 강조했다.

<"수영 선수 또는 수영 기술에 대한 대화", “ Der Schwimmer oder ein Zweigespräch über die Schwimmkunst ”>이라는 책에서 저자는 수영 영법과 수영을 가르치는 방법뿐만 아니라 물속에서 점프하는 법, 잠수하는 법, 익사한 사람을 구하는 법에 대해서도 설명하고 있다. 그는 평영을 가르치는 것의 우선순위를 전파했고. 그의 책은 기독교 종교 회의에서 교재로 채택 되었다. 윈만(Wynmann)의 작업의 영향으로 수영에 관한 책들이 잇달아 출판되었고, 1587년 에버라드 딕비(Everard Digby)는 <수영의 기술, De Arte Natandi>을 썼다. 1696년에 멜키세덱 테베노(Melchisédech Thevenot)는 <이미지로 표현된 수영의 기술, 유용한 목욕법, “>을 출간해 유럽 전역에서 인기를 끌었다.

17세기 이후 수영 및 신체 운동 관련 서적의 출판

17세기부터 수영이나 수영을 포함한 신체 운동에 관한 책들이 잇달아 출간되었다. 1741년에는 네덜란드의 장 프레데릭 바흐스트룀( Jean Frédéric Bachstrom)이 쓴 책이 출간되었는데, 이 책이 익사로부터의 구출에 관한 최초의 참고서라고 할 수 있다. 바흐스트룀(Bachstrom)은 학교 커리큘럼에 수영 수업을 통합하기 위해 노력하기도 했다. 그의 생각과 아이디어는 이미 르네상스를 예견하고 있었다: "인간은 동물과 마찬가지로 태어날 때부터 수영을 할 수 있으며, 개구리의 움직임과 비슷한 움직임을 만들기 위해 충분한 용기를 더하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1786년, 비슷한 인본주의 사상을 전파하는 작품인 <"아르 드 나게르", “Art de nager”>가 파리에서 출판되었다. 이 작품의 저자는 인간은 원래 수영을 할 수 있었지만 문명이 인간을 왜곡했다고 말했다.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멀어지면서 동물(개구리, 개)이 여전히 사용하는 이 고유한 능력을 잊어버렸다고.

<"아르 드 나게르", &ldquo;Art de nager&rdquo;> 삽화


  3회 <르네상스 시대의 수영> 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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